Seeing Touch and Being Touched by the Seen 2026
왕리인, 미술사가
소설가 존 버거(John Berger)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서두에서 “보기는 말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 신체의 형성 과정을 되짚어 보면, 감각의 층위에서 만짐은 보기보다 선행한다. 태아의 발달 과정에서 촉각은 시각보다 먼저 형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가 경험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신체적 표현으로 되돌아간다. 몸짓과 움직임, 그리고 만짐이 그 표현의 방식이 된다.
이처럼 언어라는 매개를 경유하는 과정 속에서 보기와 만짐은 다시 서로를 호출하며, 지각의 장 안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한다. 보기는 대상을 인식의 대상으로 드러내고, 만짐은 신체적 경험을 통해 그 인식을 심화한다. 두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식은 단일 감각의 한계를 넘어 보다 확장된 이해로 형성된다.
1.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인식의 출발점으로 여겨져 온 ‘보기’는 오랫동안 시각이라는 감각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언어 속에서 ‘보기’라는 개념을 추적해 보면, 그것은 결코 시각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중국어, 영어, 한국어에서 모두 ‘보기’는 감각적 행위를 넘어 이해와 판단, 경험의 형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작동한다.
중국 한자 ‘간(看)’은 손(手)이 눈(目) 위에 놓인 형상으로 구성된 회의문자다. 이는 단순히 먼 곳을 응시하는 행위를 의미할 뿐 아니라, 보는 과정에 신체적 개입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간(看)’은 관찰과 숙고, 판단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영어 표현 “I see”가 이해를 뜻하고, 한국어에서 ‘들어보다’, ‘만져보다’가 경험을 의미하듯, 보기는 감각적 지각을 넘어 신체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앎의 과정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보기가 이러한 인식적 확장을 획득해 온 과정은 동시에 권력과 위계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본다’는 것은 곧 접근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지식과 문화 자원의 분배는 특정 집단에게 시각적·인지적 권한을 집중시켜 왔다. 그 결과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인식의 간극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보기는 단순한 감각 작용이 아니라 관계와 권력, 거리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보는 행위는 단순히 가시성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적 행위이다. 봄을 통해 획득한 것은 때로 타자를 향한 ‘시선’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역학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전개될 때, 거리와 가치의 위계가 형성된다. 중국 고대 미학 전통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 “가원관이불가설완(可遠觀而不可褻玩)”은 이러한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희롱하거나 가까이 다룰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러한 윤리는 박물관과 같은 공간에서도 지속된다. 진열장 안에 놓인 문화재는 존중의 거리를 유지한 채 관조의 대상으로 남는다. 보는 것은 빛이 망막에 상을 맺는 생리적 과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 속으로의 투사이며, 지각이 곧 인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봄과 앎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관계는 예수가 말한 눈멂과 봄에 대한 변증법적 논의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이 세상에 심판하러 온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자부하며 스스로를 분명히 보는 자, 곧 계몽된 자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자기 확신적 오만을 질타하며, 자신의 눈멂 — 곧 무지를 인정할 때에만 새로운 말씀, 즉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무지 또한 우리가 충분히 보고 있다고 믿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이유로 위대한 지혜는 단순한 ‘시력’이 아니라 ‘통찰’을 지향한다. 엄정순은 세 벽면을 가득 메운 1,000권의 흰 책으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을 통해 시각 중심적 관객을 초대한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이 책들은 사실 점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 체계이다. 읽을 수 없는 지식의 상징들 앞에서 관객은 지식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불안과 무력감을 경험한다. 이로써 ‘보통의’ 관객은 예상치 못한 취약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바람에 의해 넘어가는 책장 소리와 빛과 그림자의 변화, 촉각과 청각의 미세한 자극은 관객의 감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배치한다. 시각적 이해를 잠시 유예하는 순간, 종이의 탄성, 공기의 흐름, 음향의 잔향과 같은 비가시적 요소들이 인식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이 지점에서 작품 제목 ‘찰나’는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다. 외형을 인지하는 행위가 ‘견(見)’이라면,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과정은 ‘관(觀)’에 가깝다. 불교에서 찰나는 측정 가능한 시간 단위가 아니라 존재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무상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모든 경험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건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인식은 완결된 이해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형성되는 감각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정렬된 책들의 풍경은 전통 문인의 서재를 환기한다. 고서와 필묵, 골동품으로 구성된 서재는 오랫동안 지식과 수양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엄정순의 작업 속에서 이 장면은 변형된다. 책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지식을 담고 있으며, 바람에 의해 넘어가는 페이지는 지식이 물리적 경계를 넘어 확산되는 움직임을 암시한다. 이 공간에서 통찰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감지된다. 이제 더 이상 이상화된 지식과 미학을 회화적으로 재현한 책가도(冊架圖)가 필요하지 않듯이, 사방탁자와 같은 서재 가구 또한 작가에 의해 새롭게 사유된다. 사방이 트인 선반 구조의 사방탁자는 더 이상 단순한 기능적 가구가 아니라, 인식의 방식을 전환하는 매개로 재구성된다.
이는 다시 처음으로 우리를 되돌려 보내며, 시각 중심주의를 의심하고 이해의 차원을 확장하는 새로운 지각의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2.
엄정순은 사방탁자를 새로운 감각 경험의 장으로 변형시키며 관객을 삶의 가장 원초적인 탐색 방식인 ‘만짐’으로 이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만지는 행위를 동시에 관찰하게 된다. 조심스럽고 불확실한 손짓으로 우리는 부피와 공간, 미세한 질감과 온도, 단단함의 차이를 감지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가 수행하는 접촉은 결코 개인적 행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만지고 있는 표면은 이미 타인의 접촉을 축적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은 언제나 복수의 만짐을 내포한다.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손, 설치 과정에 참여한 스태프의 손, 그리고 이전 관람객들의 손이 중첩되어 존재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접촉이지만, 과거의 만짐 역시 미세한 흔적으로 표면에 남아 있다. 모든 만짐은 자취를 남긴다. 어떤 흔적은 명확히 인식되며, 어떤 흔적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 상태로 잠재한다.
‘보기’가 종종 거리와 은밀한 위계를 동반한다면, ‘만짐’은 보다 친밀하고 겸손한 감각으로 작동한다. 만지고자 하는 충동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시각의 한계에서 발생한다. 시각은 형태와 색채, 재질과 질감을 인지할 수 있지만, 상상된 촉감은 결코 신체가 직접 경험하는 감각을 대체할 수 없다. 또한 현대미술이 생산해 온 다양한 시각적 환영은 관객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보다 확장된 인식을 위해 다른 감각을 요청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만짐은 형성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마찰과 접촉을 통해 소멸을 초래하기도 한다. 기념비의 문자는 바람과 비, 반복된 접촉 속에서 점차 마모된다. 박물관이 접촉을 제한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물리적 변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만짐이 가져오는 소멸의 가능성을 두려워하지만, 접촉이 항상 상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사지가 통증을 완화하듯, 따뜻한 접촉은 긴장과 불안을 완만하게 해소하기도 한다.
엄정순은 바로 이 지점, 만짐이 초래하는 침식과 재생 가능성이 교차하는 순간에 주목한다.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코 없는 코끼리>에서 관객은 설치 작품의 표면을 직접 만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모 표면에는 반복된 접촉으로 인해 보푸라기가 형성되었다. 작가는 유지 보수를 위해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 보푸라기야말로 관객 참여의 가장 직접적인 흔적임을 발견하게 된다. 보푸라기의 분포와 밀도는 어느 부위가 가장 자주 접촉되었는지를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 일시적으로 현재에 재현된 듯한 장면이었다. 만짐의 흔적은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수집된 보푸라기는 엮이고 염색되는 과정을 거쳐 회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만짐’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회화적 매체로 전환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색채나 레이어의 구성만이 아니다.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실제 존재가 물질적 형태로 작품 내부에 편입된다는 점이다. 만짐을 통해 확장된 생명성은 새로운 시각적 형식으로 가시화된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푸라기는 원래 작품 구조의 일부였다. 그러나 반복된 접촉 속에서 관객의 지문, 피부 입자, 먼지가 혼합되면서 새로운 물질적 층위를 형성한다. 동시에 관객의 손끝에는 이전 방문자의 흔적이 전달된다. 접촉은 에너지의 교환이자 이동의 과정이다. 우주에서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형태로 전환된다. 정신적·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수십만 관객의 만짐은 관심과 사유, 감정을 보푸라기 속에 축적하며, 이 축적된 흔적은 또 다른 예술 형식으로 재구성되어 새로운 접촉을 계속 수용한다.
3.
보기와 만짐은 본래 상호 보완적 인식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열반경(涅槃經)』에 등장하는 맹인모상(盲人摸象) 우화에서는 두 감각이 갈등 속에 놓인다. 이 이야기는 부분적 경험을 통해 전체를 단정하려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 우화를 비판적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면 또 다른 질문이 등장한다. 비판자는 전체를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며 부분만 경험한 이들을 조롱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스스로 전체를 인식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언제나 세계의 일부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정보화 시대 속에서 인간은 또 다른 형태의 ‘맹인’이 되어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우리는 파편화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조합하여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러한 과정은 수동적 수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인식 능력과 경험에 의해 능동적으로 재구성된다.
원래 우화에서 갈등이 발생한 이유는 부분적 촉각 경험이 전체에 대한 확정적 주장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끼리는 단순한 외형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만약 각자가 피부의 질감과 온기, 살아 있는 존재감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 경험 사이의 공명으로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파편의 합집합이 아니라 교집합을 탐색하는 태도는 보다 유연한 인식 방식을 제안한다.
엄정순은 코끼리라는 모티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마주하는 거울을 제시한다. 그녀의 작업은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촉각적 탐구를 인식의 대안적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한때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고 평가되었던 만짐은 오히려 새로운 미학적 가치로 전환된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접촉은 진실하고 겸손하며 조용하지만 강력한 관계 형성의 방식이 된다.
관객들은 이러한 에너지의 전달 과정에 참여하도록 초대되며, 촉각을 통해 각자의 ‘코끼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에 오르게 된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에게 『바벨의 도서관』이 그러했듯, 엄정순에게 코끼리는 그러한 존재이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다. 원칙적으로 우리의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우주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우리가 우주 전체를 재현하는 것이 끝내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면, 반복적인 접촉이 표면 위에 보푸라기를 만들어 낸 자리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만지는 것’으로 나아가, 존재가 서로 닿는 찰나(kṣaṇa)를 경험하는 것이다.